상처와 마주하는 방식- 최후의 말을 하는 자, 영화 [혜화,동]을 보고 772


주인공 혜화(유다인)는 천사같은 사람이다. 집에 개똥이 굴러다니는 것을 감수하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직접 유기견을 구조하는데 열심이다 .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의 원장(싱글대디)의 아들에게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그녀는 천사다.

주인공 혜화는 아프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같은 날 아이마저 잃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그녀의 삶을 장악한다. 손해보는 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녀의 삶은 지난 시간에 대한 '속죄'다.  
 
한수(유연석)도 착한 사람이다. 그는 죽은줄 알았던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고, 다른 집안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후부터 그의 삶은 변했다. 아이를 잃고, 부모님의 강요에 여자친구를 두고 떠났던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계속 옭아맨다. 아픔을 참지못한 그는 집을 나와 패인이 되었다. 아이가 입양된 곳을 찾아 배회하다 이상한 사람으로 찍혀 봉변을 당하기도 하지만, 딸을 찾고자하는 열망을 멈추지 않는다. 

혜화와 한수. 그 날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다르지만(혜화는 아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고, 한수는 아이가 살아있다고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아픔 앞에 선다. 그런데 그 방식이 다르다. 

 혜화는 담담하게 살아간다. 유기견을 구하고, 병원 원장의 아이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것이 하늘나라에 간 아이의 대신을 찾거나,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동으로 유추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고 말할 수 는 없다. 유추로만 가능한 애도를 반복하며 그녀는 아프다고 밖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는 아픔을 가슴 속에 품어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영화는 철저히 그녀의 얼굴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녀의 무표정에서 그녀의 아픔을 조금씩 발견한다. 

 반면에 한수의 아픔은 소리가 크다. 그는 딸을 보기위해, 거침없이 딸이 사는 집을 찾아간다. 혜화를 먼저 찾은 것도 한수였다. 우리는 한수의 아픔을 그의 행동을 통해 읽는다. 눈물을 쏟고, 혜화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아픔 앞에서 큰 몸짓을 취하며, 잘못된 과거를 되돌리고자 발버둥치는 한수. 영화 초반 연주되었던 '앵콜요청금지'라는 노래가 무색하게 그는 가열차게 앵콜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적극적인 한수의 행동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다가온다.

 
   유치원에서 아이를 되찾으려할 때(혹은 납치하려 할 때) 혜화는 매우 주저하다가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불법 주차한 차가 견인되었다는, 어쩌면 매우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일로 그녀는 아이를 되찾는 것을 포기한다. 그녀에게 딸을 만나고, 되찾는 것은 간절하며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고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저지르기'보다는 '다시 생각하기'를 선택한다.

 반면에 한수는 그녀의 실패를 목격하고, 바로 아이를 혜화의 집에 데려다 놓았다. 이는 아이와 함께 하고픈 혜화를 위해서, 아빠로서 아이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며, 이를 두고 그를 마냥 범범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지금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안이 발생했을 때, 수많은 의견들이 비내리듯 쏟아진다. 트위터, 페이스북같은 SNS는 이러한 의견이 전달되는 주요한 매개가 되었다. 강한 분노와 자책, 환희 등 다양한 감정 수반되는 트윗들은 '여론'을 형성하며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트윗들. 짧은 몇 문장을 통해 그들은 직설적으로 자신을 말한다. 마치 자신의 아픔을 격렬하게 토로하는 '한수처럼'.

 반면에 사건을 대면했을 때 '적절한 말'을 찾는데 고심하고, 가장 이상적인 말(불가능한 말)을 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아마 문학적인 말(시의 언어)일 것이다. 오랜시간 사유의 과정을 견디고, 숙성된 채 겨우겨우 밖으로 나옴에도, 온전히 사건을 표현하지는 못하는 실패의 말들. 이러한 말들은 무수히 많은 말들이 빠른 시간 안에 오고 가는 오늘 날, 무익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하지만 주로 예술가들이 수행하는 이러한 도전은 숭고한 성실성을 확보하며 오랜시간 지속되며 끝까지 살아남아 향기를 전달하는 최후의 말이 된다. 

 개인적으로 분명히 하고 싶다. 나쁜 말과 좋은 말, 그리고 더 좋은 말이 있다는 사실을. 단연 향기를 지속시키고 오랫동안 살아남는 말이 더 고급스럽고 좋은 말일 것이다.  대상을 바로보는 과정에서 수반된 고통을 견디고, 숙성된 채 나오는 좋은 말. 최후의 말은 그 말이 하나의 삶의 형식이 되며, 사건과 듣는이 사이가 서로 어울리도록 만들어준다.  

 우리는 혜화,동에서 하나의 사건을 놓고 아파하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표정으로든, 행동으로든 아픔을 토로하는 두 주인공은 사실 관객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사람 중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더 나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서로 조금 다른 말을 하는 두 사람의 말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최후의 말'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는가?   죄책감을 초래한 사건을 누가 '잘' 마주하고 있는가? 진심을 다해 아파하는 자는 누구인가?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이 끝날 때, 혜화는 백미러에 비친 한수를 향해 후진한다. 몸부림치며 아픔을 표현했던 한수는 분명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단편적이고 직설적인 큰 흔들림을 만들며 아픔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겨우겨우 상처로부터 조금씩 고개를 돌리기 위한 몸짓이었다. 
 반면에 엄숙하게 온전한 아픔을 마주해왔던 혜화는 결말에 도래한 충격도, 지금까지의 아픔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혜화,동이 좋았던 나는 이것이 '모성'이라든지 '여성'과 같은 식상한 가치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이 힘을 바탕으로 혜화는 자신을 배신했던 한수를 포용한다. 그녀의 상처는 흉터로 남아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게 할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갈 것이다. 한수의 아픔도 어루만져 가며 '앵콜'을 외칠 수 있다.

혜화는 그 때부터 '최후의 말'을 준비해왔고, 계속 '최후의 말'을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덧글

  • Lucie 2014/04/01 10:22 # 답글

    리뷰 좋네요. 같은 아픔(기실 같은 아픔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두 시각이라.. 개인적으로는 배우 유다인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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