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이 불편한 역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로리타]를 보고 772


        나에게 '야동'은 (1~2일에 1개 정도) 일상이다. 괜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특히 남자들은) 야동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윤리와 엄격한 잣대를 (때때로) 앞세우는 방송국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야동'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로 활용된다. 우리는 XX녀 사건이 터졌을 때,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웹하드를 통해 동영상을 공유하고 우정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몇 달, 개인의 웹하드를 검사하여 야동 유통구조를 발본색원하려 했던 정책은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급증한 성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는 들끓었지만, 그 분노가  '성범죄의 원인이 야동에 있다'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하지는 못한 것이다.

        구성애 아줌마를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의 성(性)은 지극히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외쳐온 노력은 꽤나 효과를 거둬왔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 자연스럽게 '섹드립'을 하고 '야동을 보는 것'은 성적 욕망에 의한 당연한 행동이라고 자신하며, 이를 말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서 '음란하다'라고 규정되어 억압되고 숨겨져야 했던 요소가 위태위태함을 견디고 그 억압의 덮개를 벗어던질 때 해방감을 느낀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방을 기다리고 있는 욕망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순결하고 고결한 성(性)으로부터 탈출',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해방감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균질하게 내려지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술집에 가서 아가씨 좀 끼고 놀며 주무르고 쓰다듬어도 되는데, 누군가는 15살 어린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암캐'가 되고 '색녀'가 된다. 누군가는 예전에 연인이 많았다는 것이 능력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전에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순결딱지'를 떼어버린 증거가 된다. 당장 나는 남성(男性)이라서 '야동'은 일상이다!라고 떠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성(性)적 욕망은 많은 경우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체계를 기반으로 한 체제 안에서 이성에 대한 형태로 발생하곤 한다. 이러한 성적 욕망을 사회는 '연애', '결혼'이라는 '배타적으로 소유, 독점' 하는 양식을 통해 통제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매일 방영되는 홈 드라마에서 우리는 '아내'(여자친구)는 남성의 여성편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남편'(남자친구)는 아내의 내면을 수시로 감시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너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첫 사랑이 누구였어? 라고 질문하는 형태로). 이처럼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의심은 보통 구체적인 물증을 가진다.(와이셔츠에 묻은 립스틱, 카드 명세서) 반면에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의심은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 단순한 '자기불안'에서 비롯된다. 생활 속에 익숙하게 자리잡은 이러한 관계는 이 세계 속 남성과 여성의 욕망을 둘러싼 권력관계가 매우 비대칭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로리타>(1962)는 남성이 우위에 서는 것이 당연시되는 성적 욕망의 위계가 남성과 여성 모두 대칭적으로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문학교수인 남자 주인공(험버트)는 자신의 성적욕망을 거침없이 순수하게 발산한다. 그의 욕망은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마저 뛰어넘는다. 12세 소녀 로리타와의 사랑을 위해 거짓된 결혼마저 감수하고, 자신의 부인이자 로리타의 어머니인 샬롯 부인의 살해를 꿈꾼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그의 욕망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나이 다 먹고 교수까지 되가지고 자기 딸만한 애를 탐하다니", "어쩌면 애 엄마를 죽이고 그 애와 연애질을 할 수가 있지' 식의 보통의 시선으로 그(험버트)를 바라봤다면, 우리는 더 농도 짙은 성애 장면과 키스신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험버트의 성적 욕망은 자극적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적어도 주인공 험버트의 로리타에 대한 욕망에 관해서 만큼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우리가 나이와 계급을 초월한 욕망의 순수함과 열정에 초점을 맞추고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에만 초점을 맞추고 <로리타>를 봤다면 결말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험버트는 로리타에게 버림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추락하지 않는가? 그러면 결국 험버트는 사회의 금기를 어기고, 살인을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것 아닌가?

        거침없이 질주하던 험버트의 욕망은 목표인 '로리타'에 안착한다. 그런데 로리타와 함께 더 높이 상승할 것이라고 생각되던 그의 욕망은 이 순간부터 정체된다. 아니, 추락하기 시작한다. 로리타에 도달한 순간이 '욕망의 그래프'의 정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왜 험버트는 로리타를 사랑했을까? 법과 도덕, 윤리적 비판을 뛰어넘은 그의 욕망은 단순히 '로리타가 예뻐서', '원래 어린애를 좋아하는 로리타 컴플렉스 환자'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고상한 대학교수를 한 순간에 욕망의 화신으로 만든, 그 실체는 험버트가 로리타로부터 자신을 발견한 지점에 있었다. 험버트는 넘치는 욕망을 주체 못하는 자신을 거울 앞에 세웠다. 그 거울에는 로리타가 맺혀있었다. 12세 소녀 로리타는 생기있고 자유를 갈구하며 활기가 넘친다. 거침없이 식욕을 드러내고 자신을 구속하려는 요인(샬롯부인)에 당당히 맞선다. 험버트에 대한 호감 또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로리타도 험버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망을 순수하고 강렬한 형태로 발산하는 인간인 것이다. 서로를 갈구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시너지 효과를 위해 만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험버트와 로리타가 연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는 내심 그들의 욕망이 만들어낼 폭발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험버트와 로리타의 만남 이후 두사람은, 아니 험버트는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로리타는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살아있고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런데 험버트는 로리타에 도달한 순간부터 자신과 로리타의 욕망이 대칭을 이루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녀가 남자 아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 연극에 참여하는 것까지, 자신을 끌어당겼던 매력을 더 이상 발산시키지 못하도록 그녀를 억압하려 한다. 하지만 로리타의 욕망은 그렇게 쉽게 식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욕망은 험버트를 남겨둔 체 홀로 가파르게 상승한다. 이에 험버트는 그녀와 둘만의 여행을 결심한다. 자신과 로리타의 욕망 모두를 꽁꽁 싸메고 가두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한 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역설적 사랑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로 귀결되고 만다. 로리타와 연인이 된 순간, 그는 욕망이 대칭을 이루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는 곧 그의 욕망이 내포한 에너지를 스스로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험버트와 로리타가 향하는 화살표의 방향은 틀어지기 시작했고, 둘의 접점은 사라졌다. 로리타의 욕망은 세계가 강제하는 권력체계를 여전히 뛰어넘을 수 있지만, 험버트의 그것은 권력체계에 편입된 것이다.

        험버트-로리타가 보여주는 남-여의 권력 관계는 이미 그들이 '나이 차'라는 하나의 제약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실제보다 유연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험버트의 욕망은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유지하고 있는 결혼, 연애 시스템은 우리의 욕망을 온전히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로리타>는 결코 우리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그 대안을 제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험버트와 로리타라는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은 인간들, 그리고 이들의 만남과 그 후 찌질해져만 가는 주인공 험버트의 후반부의 모습을 통해 시스템이 보장하는 동시에 우리 무의식에 내재되어 버린, 남성- 여성의 권력체계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허술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