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Giants)도 Anti-거인(Giants)도 아닌-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vengeance is mine, 1979) 772


       일본 프로야구는 10개의 팀이 두 개의 리그(센트럴리그, 퍼시픽 리그)로 나뉘어져 운영된다.  지금은 그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한 때는 야구팬을 Giants팬, 反-Giants 팬, 기타 팬으로 나누기도 했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통상 그들을 '거인'이라 부른다. 한 때는 일본 인구의 절반인 6천만 야구팬 중 4천만 명을 '거인'의 팬,  1천만 명은 거인을 싫어하는 야구팬, 나머지 1천만 명은 기타 9개 구단의 팬으로 나눌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양상은 최근 다양한 요인에 의해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거인'은 일본야구를 상징하는 팀이며, 야구 외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 사회에서 '야구'라는 스포츠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들에게 이러한 '특별함'이 부여된 원인은 1960년대 일본사회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이 가파른 성장을 거듭하며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던 1960년대 고도 성장기와 '거인'이 일본시리즈를 9연패하던 '거인의 V9' 시대는 일치한다. 거인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를 물리치며 리그 우승은 물론 일본시리즈까지 제패했다. 일본프로야구 구단 '거인'의 모습은 현대 일본 주류사회와 대칭을 이루는 것이다. 1960년대 일본사회에서 회사원은  단순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기업전사로서 사회에 나서야 했다. 선진국, 강대국이라는 목표아래 소년, 소녀들에게도 공부하는 전사라는 모범적인 소년, 소녀 모델이 제시되었다. 당시 '거인'의 야구는 일본 사회가 이상으로 추구했던 '이겨라, 물리쳐라' 정신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들이 보여준 야구는 철저한 '관리야구'였고,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미덕임을 보여주었다. 개개인의 타격, 투구 자세는 '이상적인 폼'에 맞추어 교정되었다. 또한 1965년부터 일본 프로야구에서 2명의 외국인 선수 선발이 허용되었음에도 '거인'은 외국 선수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순수한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선수만으로 우승하겠다는 '순혈주의'를 표방했다. 엄격한 제도아래 우수한 능력을 검증받아야만 '거인'의 선수가 될 수 있었고, '거인'의 선수는 자신보다 힘이 세고 빠른 공을 던지는 외국선수들을 상대로 '거인의 스타일'로 승리해야 했다. 그것이 '거인'의 야구였다. 즉 '거인'은 일본야구의 '도쿄대'이며 세계 경제에서 도약하고 있는 일본 대기업들의 페르소나였다. '거인'의 모습은 '일본제국 패망' 이후에도 사회의 주류로 남아 경제 성장을 주도한 극우 정치세력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참고, 견디고, 희생하며 거대한 영광(V9)을 누리는 거인의 야구전사들에서 경제성장의 전선에서 싸우는 '기업전사들'은 동류의식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초반부에는 어느 야구팀이 우승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 팀이 '거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우승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극중 형사의 표정은 내게 이 팀을 '거인'으로 생각케 했다. 동시에 주인공 '에노키즈'와 '거인'사이의 거리가 머릿 속에 그려졌다. '엽기적 살인마 에노키즈'. 그는 일본인 대다수가 '아름다운 시절'로 떠올릴 1960, 70년대의 주류 밖에 위치한 인물이다. 영화는 '에노키즈'의 일생을 통해 그의 폭력성의 뿌리와 종말을 보여준다. 해군이라는 강자에 굴복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환멸로부터 시작한 그의 사회에 대한 혐오는 미군정 시기, 전후 폐허를 딛고 본격적인 경제성장에 돌입하는 일본의 사회, 시대적 배경과 함께 증폭되어 간다. 아내를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아버지에게 성적 모욕을 주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눈송이처럼 커져가는 그의 폭력성은 결국 그를 살인자로 만든다. 살인이 다가 아니다. 아내의 간음 자체에 분개하기보다는 이를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아버린다. 아들의 보석금을 믿고 맡기는 노모의 돈을 사기치고 달아난다. 그와 함께 택시를 탄 중후한 노신사는 즉각적으로 그의 살해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야말로 '범죄 종합선물세트'이다. '거인들의 세계'가 표방하는 제도, 가치로부터 일탈하고 탈주한다.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이 뻔뻔하게 범죄행각을 이어가는 '에노키즈'! 그는 '거인'들에게서 용납 될 수 없는 인물이다. 주류사회에서 결코 그냥 놔둘 수 없는 척결의 대상이다. 그런데 감독은 그의 범죄행위를 경쾌하게까지 그려낸다. 에노키즈의 시각에서 밥 먹고 똥 싸는 일처럼 당연하게 그려지는 범죄들, 그리고 당당하기만 한 '에노키즈'의 모습에 관객이 불쾌감을 드러낼 틈조차 없다.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에노키즈의 (범죄) 질주를 우리는 그저 '언제까지 계속되려나' 하는 의문을 품고 따라가는데 급급할 뿐이다.  

        '에노키즈'는 경찰에 붙잡히고 사형을 당한다. 그의 범죄에 동조하며, 다음에는 무슨 악행을 저지를까 궁금해 하던 나였건만, 결국 그가 잡히고 사형을 당하자 안심이 된고 가슴이 후련하다. 그런데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에노키즈는 과연 '거인들의 세계'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었을까?
 에노키즈의 범죄대상들을 살펴보면, 그들 역시 '거인들의 세계'에서 결코 주류에 설 수 없던 사람들이었다. 여자, 혼자 사는 노인, 여관을 운영하는 후첩, 재일교포, 살인 전과자. 그의 폭력성은 '거인들의 세계'로부터 비롯되었건만 그의 폭력이 행하는 곳은 그 근원이 아닌, 거인들의 세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폭력의 방식은 '거인들의 사회'가 에노키즈를 배제시켰던 방식과 동일하다. '경제성장'이라는 가치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합하는 '거인들의 세계'의  운영방식과 '돈'을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느끼는) '에노키즈, '다수를 위한 시스템'이라는 이유로 소수자와 개인을 무시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체제(체제에 속한 구성원, 우리)와 사람을 죽이고 뻔뻔스럽게 차분히 돈을 세고, 그 돈으로 애인에게 용돈까지 주는 에노키즈의 모습은 절묘하게 겹쳐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노키즈는 '거인들의 세계(Giant's league)'에서 뛸 수 없다. 그들 밖에 있으면서도 그들처럼 행동하는 자, 에노키즈! 

        1960년대 세계는 요동을 쳤다. 새로운 철학, 새로운 사상이 미세한 균열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좁은 틈을 비집고 나와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기존의 질서체계를 수용하고 순응하는 일본사회였지만, 이들 안에서도 새로운 흐름을 수용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엄연히 존재했다. '돈'이라는 가치아래 각자가 기계의 부품이 되어 하나의 기계를 온전히 작동시키기를 강요받던 시대, 그들은 "기계에 기름칠을 하는 대신 모래를 던지자"라고 외치며 기존 질서를 완강히 거부했다. 1960년대의 일본의 주류사회를 '거인들의 세계'라고 명명한다면, 분명 이러한 흐름에 동조하지 못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안티-거인'들의 목소리도 자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 '에노키즈'는 이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는 '거인'이 아님에도 '거인'처럼 행동하며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에게 '거인'이 되기를 바랐다.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이 갖고 있는 폭력성의 근원으로 눈길조차 돌리지 못하면서...

        마지막 장면, 에노키즈의 유골이 날아다닌다. 그의 해골이 공중에 멈췄을 때, 마치 나의 머리가 화면 속에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거인들의 세계'라고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한 '거인'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거인이 아님에도 스스로가 거인이라고 믿으며 자신이 밟아버릴 나머지 9개 구단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나도 이 정도면 나름 '거인'이지! 하며 자위를 한다. 스스로가 약함은 인정할 수 없으니, 더 약한 자를 찾아, 그들을 딛고 일어서야만 하는 '거인들의 세계'!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복수는 결코 에노키즈의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복수는 '거인'들의 것이다. 

덧글

  • 동사서독 2014/01/02 21:21 # 답글

    한국 영화 공공의 적 초반, 비리형사들끼리 대화하는 중에 설경구가 연기한 강철중 형사가 '롯데가 또 졌냐?'고 말하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같은 '자이언츠'인데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방식이 참 대조적입니다. 설경구는 영화 해운대에서도 롯데 자이언츠랑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었죠.
  • 꿔바로우 시네마 2014/01/02 21:51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속의 하나의 삽입 장면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얕은 야구 지식을 바탕으로 '거인'이라는 가정하에 생각을 한 번 발전시켜봤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롯데 자이언츠는 워낙 인기팀이다 보니 우리나라 영화 속 단골소재로 등장하죠 ^^. 다만 롯데는 '거인'보다는 차라리 갈매기(혹은 부산) 이미지가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아직도 '부산 특유의 감성이 충만한 열정적인 팬을 가졌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팀' 의 색깔이 강한 것 같습니다 ㅎㅎ
    혹시 롯데 팬이라도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LG트윈스 팬이거든요 ㅎㅎ 야구를 좋아하신다면 다 알아서 들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 동사서독 2014/01/02 22:11 #

    영화 속 시기상 우승이 당연하게 받아진다면 요미우리 자이언츠 맞을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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