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와 마주할 시간-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2013)을 보고 772


[변호인]은 사건이다.         

 

사건이 이상하리만큼 강한 힘을 가지며 대중을 끌어당기는 시간이 있다.  201312, 영화 [변호인]은 열정의 시간을 만든 사건이 되었다.  사건이 강한 인력을 가질수록, 그 시간은  깊은 허무함도 선물한다지난 밤 즐거운 술자리가 기억이 되고 시작한 숙취의 순간, 우리는 보통 허무함을 잊기 위해 또 다시 강림할 새로운 시간을 기다린다. ‘이것 또한 다 지나가리라.’  [변호인]은 현재의 한국 영화 주류 시스템의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 상업영화이다. 이 말은 관객은 영화에 대한 감상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살인의 추억]을 보고 일어난 흉악범죄와 공소시효 제도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지나간 감정이다. 오늘 극장에서 우리는 송우석 변호사의 절규는 기억의 자리로 밀어놓고, 엘사의 노래에 열광했다. 어차피 새로운 영화는 나온다. 우리는 허무함을 마주하는 일은 낭비로 여기며새로운 자극을 찾아왔다.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익숙하게 반복해온 패턴이다. 이것은 문화가 산업이 되기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변론답지 못한 변론]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될 것 같다. ‘노무현이라는 소재를 다루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변호인]은 어떠한 이유로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라는 딱지가 모든 무책임을 변호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작사 대표의 인터뷰나, 모 유명 영화평론가의 말은 비겁하게들린다. 영화를 정치적으로 보기보다는 80년대의한 개인이 시대를 장악한 비상식과 싸우는 과정으로 봤으면 좋겠다.’ ‘이 영화에서 정치적 맥락을 될수 있는대로 배제하고 보면, 탁월한 상업영화들이 보여주는  영웅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 송우석(송강호)는 영화 초반 현실감각(사회의식)이 없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현실감각을 획득하고 영웅적 투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 사실을 망각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갖는 영향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친노라고 불리는 정치세력이 활동하고 있다. 보수층에서는 세상을 떠났음에도희화화하는 방식으로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정치적 편향성을 놓고논란이 되자, 관객들께서는 현실감각을 잊고 영화를 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태도인가?     


[몰입의 능력= 1,000만 관객의 자격]

 

영화 상영 중, 송우석 변호사의 변론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친 관객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절반이 넘는 관객들이 엔딩 크레딧을 보기위해 자리를 지키고 눈물을 훔쳤다. 모두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아마도  이는 영화가 관객들을 매우 훌륭하게 감정이입시켰다는 반증일 것이다 [ 1. 부정적인 주인공-> 2.  주인공을 변화케 하는 사건-> 3. 긍정적으로 변한 주인공과 악의 대립-> 4. 해피엔딩] 헐리우드 영화가 잘 사용하는 전통적인 내러티브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과 잘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몰입을 돕는다. 게다가 극중 송우석의 반대편에 선 경찰(차동영)과 검사(강검사)는 절대적인 악으로써, 분명하게 선과 악을 구분지어놓는다. 영화는 누구의 편에 서야할지, 누가 옳은지 명쾌하게 답을 내려놓는다. 관객은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이미지와 내러티브가 이끄는대로 그저 편안히 따라가면 된다. 누군가의 말대로 탁월한 대중영화로서의 선택이다. 분명 1,000만관객 영화가 될만하다.

 

(영화는 차동영의 애국가에 대한 반응 등을 통해,  그를 철저한 국가주의자로 제시하며,  그에게 나름의 명분을 부여하고자 한 의도를 보인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그를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영화의후반부 속 송우석 대 차동영의 구도에서, 영화는 송우석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는 동시에 그를 상식(절대선)을 추구하는 영웅으로 만든다. 동시에 그의 반대편에 선 차동영의 활동범위를 급격히 제한시켜버리며 그를 평면적으로, 절대적인 악을 보여주는 인물로 한정시켜버리고 만다.)


[조심성의 미학]

 

미국에서는 최근  몇 년사이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링컨을 두고 영화 두 편을 만들었다.  [링컨] [링컨: 뱀파이어 헌터].  [변호인]은 현실에 많은 부분 발을 딛고 있는 점에서 [링컨]과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 에서 주인공 링컨(다니엘데 루이스)은 우리에게 익숙한 위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의 반대편에 서서  노예해방을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결코 악인이 아니다. 그들도 타당한 명분을 갖는다.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 링컨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물론,  관객은 영화를 통해 인간 에이브라함 링컨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 그것은 링컨과 함께 영화 속 시대를 고민하고 생각하였을 때 가능하다.  대중영화의 최고 자리에 오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관객들에게 이러한 불편을 제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실존 인물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다룬다는 것이 그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좋은 영화는 등장하는 개별 인물이 인간이 되어 살아 움직이며,  시대상 또한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다루더라도 제작자들의 관점이 반영되며,  관점은 사건에 대한 해석으로 나타난다.  스필버그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춘듯 하다. 그는  링컨과 그의 시대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카메라가 조망하는 하나 하나에 숨결을 부여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링컨]에서 서사를 통해 인물과 상황을  'OO하다.' 고 확실하게 규정하기는 매우 힘들다. 영화는 시종일관 극단으로의 질주를 지양하며,  모호하기 그지 없는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표현하는데 힘을 쓴다.  이러한 불확실 가운데에서도 관객은 '링컨'의 위대함이라는, 제작진의 의도를 읽어낸다.  뚜렷한 의도나 목적은 서사보다는 섬세한 연출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세련된 소통방식.  [링컨]은 상업영화이면서도 좋은영화의 덕목을 갖춘 영화가 되었다.

 

(변호인 중 송우석 변호사와  언쟁을 벌였던 재벌 2세 이창준(류수영)이 지나치게 소모적으로 사용된 것은 매우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차동영보다 훨씬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단순한 영웅적 인물이 되어버리는 후반부 송우석을 보다 인간으로서 첨예하게고민케 하는 인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좋은 영화 만들기]

 

미국에서 같은 해에 한 인물을 놓고, 전혀 다른 색깔의 영화가 나온 것처럼,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관점이오고갈 수 있다. 그 형식이 다양하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관점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해야한다)  [변호인]은 노무현과 그의 시대를 잘 그려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1980년대는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상식과 비상식의 첨예한 대립이다.  87년 6월 항쟁의 함성이 교과서와 대중매체에 의해 기억되는 방식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이 양상은 우리 대다수에게 선과 악의 대립으로 각인되어 왔다. 제작자들은 그러한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설령 그렇다해도, 좋은 영화에서는 상이한 관점도 영화를 통해 소통하고, 대화된다.  인간이 살아움직이고 수많은 변수를 내재한 맥락들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변호인] 속의 인물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로써, 예측 가능하며 틀 속에 갇혀있다. 관객은 분명한 내러티브가 주는 프레임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고, 생각하기를 차단당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영화가 대중적 성공을 이루어낸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상업영화’, ‘대중영화’ 담론을 가져와서 이 영화에 대한 평론과 논쟁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무책임이며, 관객을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영화 속에서 다루지 못했던 인물 개인과그들을 둘러싼 시대에 대한 논의들. , 영화가 미처 해결하지못하고 남긴 잔해와 마주해야 한다.  영화가 사유의 틈을 주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변호인]을 더욱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P.S 송강호와 노무현


             [변호인]은 너무 아쉬운 영화다.  ‘송강호라는 대배우가 노무현이라는우리 역사의 문제적 인물을 다시 연기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다시 한 번 그가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송강호가 가진 힘을 믿고,  조금 더 고민하는 영화가 되었어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대중적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미련이 남는다. 실제로 여러 설정에서 그러한 고민의 흔적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송강호는 영화 속 인물을 인간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배우이다 . 후반부의 재판장에서 나타난 영웅적 면모는 오히려 송강호라는 배우의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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