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 할 게 더 많다/ 잊혀질 권리 small op

주제: 잊혀질 권리



<잊지 말아야 할 게 더  많다>


 조선시대 왕은 최고 권력자였다. 막대한 힘을 가졌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하지만 왕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사관들이 작성하는 ‘사초’였다. 왕이 죽은 후 씌어질 실록의 바탕이 되는 사초에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초의 존재는 왕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책임지게 했다.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알고 싶었지만 절대 볼 수 없었고, 사관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됐다. 그들은 왕의 행적을 과오 구분없이 자유롭게 기술했다. 그렇게 남겨진 왕은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최근 유럽 사법 재판소가 ‘잊혀질 권리’를 허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공개, 개방성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정보사회에서 최소한의 개인 인권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정보통신 기술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한국에서도 잊혀질 권리 도입 여부를 놓고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간다. 이것이 법 제도로 뒷받침되면 신상털기, 사생활 침해 등 많은 부작용을 놓았던 인터넷 문화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데 근거가 될 것이다. 특히 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잊혀질 권리를 두고 논의를 하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당장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최근 우리는 언론의 검증 과정, 인사 청문회에서 공인의 지난 날 과실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모습을 목격한다.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관행’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돕는 것을 ‘의리’로 포장해왔던 모순이 민낯을 노출하는 형국이다. IT 기술은 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발생했던 이와같은 폐해를 시정하는 데 획기적이었다. 정보의 보관과 열람 과정은 편리해졌고 다수가 사회 공론장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다수가 소수를 견제 감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공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은 투명하고 옳바른 사회가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현 상황에서 ‘잊혀질 권리’가 확대된다면 그 가장 큰 수혜자는 노출 빈도가 많은 공인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잊혀질 권리가 여전히 투명성이 정착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감시의 눈을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잊혀질 권리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 100년 넘게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다 지금 그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개선하고 있는 나라들과 우리는 다르다. 군사 독재,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경직된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말하는 것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국가보안법, 집시법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법과 제도가 소수를 위해 다수가 가져야 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례를 자주 접해왔다. 정부 권력에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인터넷의 속성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발전이 걸음마 단계인 현재 우리를 되돌아볼 때 ‘잊혀질 권리’는 이전처럼 권력의 입맞에 맞는 용도로 사용될 소지가 있다. 


조선의 왕은 많은 공적 권한이 부여된 공인이었다. 권력자에 대해 가감없이 기술하는 사초와 독립적인 신분의 사관은 왕을 견제, 감시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연산군을 제외하고 모든 왕들은 사초와 사관이 유지되는 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사초는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500년 간 왕조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힘이었다. 오랜기간 권위적인 체제를 경험하며 한국 사회는 투명하게 일을 수행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며 권력을 감시하는 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했다.  문화의 부재를 실감하며 전사회적인 몸살을 겪고 있다. 이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까지 생기는 실정이다.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의 와중에  ‘잊혀질 권리’를 앞에 내세우는 주장은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고 다수의 소수에 대한 감시의 기능을 강화하는 커다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잊혀질 권리’는 잠시 유보되어도 좋다. 지금음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게 더 많다.


덧글

  • 그냥 2014/06/24 10:35 # 삭제 답글

    '잊혀질 권리'의 유보는 한 편으로는 말씀하신 것처럼 긍정정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부정적인 면도 많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다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함께, '공인'이 아닌 사람들, 특히 힘없는 서민들에 대한 '인권유린'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p.s. IT의 발달 역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로 인해 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IT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부정적인 면을 줄여나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하고, 또 그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부정적인 면을 도외시 하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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