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황당한 질문
두번째- 악과 맞서기 위해 덜한 악을 취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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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odbbang.com/ch/8976
삶과 죽음은 가치중립적인 현상인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근거로 들기엔 맞지 않네요.
그럼에도 굳이 설명하자면..
한 인간의 생명 유지가 개인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가정해볼 때,암은 창희씨 말대로 엄청난 해악이죠. 하지만 그 해악을 없애는 방사능 치료 역시 암처럼 악합니다. 암과 함께 온전한 세포까지 모두 죽여버리니 말이죠. 환자가 그 치료방법을 택하는 이유는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 없을 땐 큰 악을 없애기 위해 차악의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차악의 수단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보상하고, 책임지는 충분한 노력이 필요하겠죠.(이 노력이 없다면 차악의 수단은 결코 정당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말한 체게바라 역시 '게릴라전(폭력)'이란 차악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나요?
한 인간의 생명 유지가 개인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가정해볼 때,암은 창희씨 말대로 엄청난 해악이죠. 하지만 그 해악을 없애는 방사능 치료 역시 암처럼 악합니다. 암과 함께 온전한 세포까지 모두 죽여버리니 말이죠. 환자가 그 치료방법을 택하는 이유는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 없을 땐 큰 악을 없애기 위해 차악의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차악의 수단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보상하고, 책임지는 충분한 노력이 필요하겠죠.(이 노력이 없다면 차악의 수단은 결코 정당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말한 체게바라 역시 '게릴라전(폭력)'이란 차악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나요?
강창희:
사실 이러한 사항을 현실적인 사례, 역사적인 사례에 대입해서 이야기 한다면 답은 뻔한 거 같아요. 말씀 대로 체게바라도 그렇고, 68혁명, 마오쩌둥 등등 이상, 꿈을 말한 사람들은 현실에서 그들이 말했던 대로 하지 못하고 좌절을 했죠. 완벽한 인간은 없고, 인간은 실수를 하니까요. 그래도 우리의 질문이 "악과 맞서기 위해 덜한 악을 수단으로 삼아도 괜찮을까?" 라는 질문이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답을 이렇게 내리고 싶어요. "괜찮지 않다!" 는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대안이 없을 때 선택하는 게 '차악'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차악'을 선택하기에 앞서 우리가 선택한 최고의 대안이 '차惡'이 아니라 '최선'으로 만들고 공인하는 과정을 선행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사실 선/악을 나누는 개념은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니까요. 말장난이 될 수도 있지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실패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를 인정하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역사적 흐름의 실패도 대부분 '최선'의 탐색이 아니라 안일한 '차악'의 선택이지 않았을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답을 이렇게 내리고 싶어요. "괜찮지 않다!" 는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대안이 없을 때 선택하는 게 '차악'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차악'을 선택하기에 앞서 우리가 선택한 최고의 대안이 '차惡'이 아니라 '최선'으로 만들고 공인하는 과정을 선행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사실 선/악을 나누는 개념은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니까요. 말장난이 될 수도 있지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실패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를 인정하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역사적 흐름의 실패도 대부분 '최선'의 탐색이 아니라 안일한 '차악'의 선택이지 않았을까요?
박동희:
공동체 사회에서 최선의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괜찮다.'라는 말은 차악의 수단을 굉장히 긍정하는 느낌인데,
제 주장은 그 의미보단 차악의 수단을 '용인할 수 밖에 없다'라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네요.
예컨대, 최선의 정책이 존재할까요.
어떤 정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항상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분명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는 소리죠. 결국 모든 선택이 어떤 의미에선 차악이란 말이죠.
최선의 탐색을 하지 말라는게 아닙니다.
최선에 가까운 차악의 수단을 택해야겠죠.
저도 어떤 선택을 '최선'으로 공인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과정에 대한 생각은 창희씨와는 다를 것 같은데요.
저는 그 과정이 차악의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엄격한 절차에 따르게 한다든지(헌법 37조 2항), 차악의 수단으로 생긴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구제책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괜찮다.'라는 말은 차악의 수단을 굉장히 긍정하는 느낌인데,
제 주장은 그 의미보단 차악의 수단을 '용인할 수 밖에 없다'라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네요.
예컨대, 최선의 정책이 존재할까요.
어떤 정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항상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분명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는 소리죠. 결국 모든 선택이 어떤 의미에선 차악이란 말이죠.
최선의 탐색을 하지 말라는게 아닙니다.
최선에 가까운 차악의 수단을 택해야겠죠.
저도 어떤 선택을 '최선'으로 공인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과정에 대한 생각은 창희씨와는 다를 것 같은데요.
저는 그 과정이 차악의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엄격한 절차에 따르게 한다든지(헌법 37조 2항), 차악의 수단으로 생긴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구제책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창희: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저는 최선과 차악은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최선과 차악이 같은 방식, 같은 형태의 모습을 띤다고 해도요.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테러이죠. 그것이 차악일까요? 저는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에서의 진술, 끊임없이 전쟁포로로 대우받기를 바랐던 자세 등등. 저는 하얼빈에서 그의 행동이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수단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최선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선악의 기준은 시간, 개인, 공간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그 애매함을 뚫고 가는 것은 각 개인 혹은 집단이 취한 선택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만약 그게 공동체에서 법이나 제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납득시키는 과정에 힘을 쏟음으로서 설득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차악의 수단을 우선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후에 설득력을 도모하는 방식은 엄연히 변명에 불과하죠.(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정말 많이 발견되지만)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테러이죠. 그것이 차악일까요? 저는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에서의 진술, 끊임없이 전쟁포로로 대우받기를 바랐던 자세 등등. 저는 하얼빈에서 그의 행동이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수단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최선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선악의 기준은 시간, 개인, 공간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그 애매함을 뚫고 가는 것은 각 개인 혹은 집단이 취한 선택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만약 그게 공동체에서 법이나 제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납득시키는 과정에 힘을 쏟음으로서 설득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차악의 수단을 우선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후에 설득력을 도모하는 방식은 엄연히 변명에 불과하죠.(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정말 많이 발견되지만)
박동희: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쏜 행위는 명백히 ‘살인’ 아닌가요?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악한 수단이죠.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 같은.
하지만 안중근 의사에겐 살인보다 더 나은 현실적 대안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뤄졌겠죠,
그들의 살인이 여타 다른 살인과 다른 이유가 뭡니까. 더 큰 악(제국주의의 불가항력적인 침탈)을 막기 위해 살인이란 차악의 수단을 썼다는 점이겠죠. 그 목적이 정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그들을 테러리스트나 살인마로 부를 것입니다.
창희씨는 그들의 의거를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셨는데, 폭력적인 독립 운동을 최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논리 자체가 결국 차악의 수단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요?
창희씨가 말한 설득력을 확보하는 과정, 충실함, 법과 제도 등등. 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확보한다손 차악의 수단이 선한 수단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뿐이지요.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쏜 행위는 명백히 ‘살인’ 아닌가요?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악한 수단이죠.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 같은.
하지만 안중근 의사에겐 살인보다 더 나은 현실적 대안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뤄졌겠죠,
그들의 살인이 여타 다른 살인과 다른 이유가 뭡니까. 더 큰 악(제국주의의 불가항력적인 침탈)을 막기 위해 살인이란 차악의 수단을 썼다는 점이겠죠. 그 목적이 정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그들을 테러리스트나 살인마로 부를 것입니다.
창희씨는 그들의 의거를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셨는데, 폭력적인 독립 운동을 최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논리 자체가 결국 차악의 수단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요?
창희씨가 말한 설득력을 확보하는 과정, 충실함, 법과 제도 등등. 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확보한다손 차악의 수단이 선한 수단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뿐이지요.
강창희:
저는 폭력이나 살인이 절대적인 악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 또한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조금 극단적이지만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에서의 대승도 살육 아닐까요?
그런 차원에서 저는 최근 지하드를 자처하며 목숨을 던지는 이슬람 테러리스트(or 순교자)들 또한 그들 나름의 최선이라고는 말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칼 프리드리히 니체는 남의 힘을 빼는 방식, 다시말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이에 해를 주는 방식이 전형적인 노예라고 혹평했죠.)
어쨌든 그들 스스로는 순교를 자처하고, 숭고하게 포장하는 모습(그게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석해줘서 순교라고 한다면)들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차악'이 아니라 '최선'일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최근 지하드를 자처하며 목숨을 던지는 이슬람 테러리스트(or 순교자)들 또한 그들 나름의 최선이라고는 말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칼 프리드리히 니체는 남의 힘을 빼는 방식, 다시말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이에 해를 주는 방식이 전형적인 노예라고 혹평했죠.)
어쨌든 그들 스스로는 순교를 자처하고, 숭고하게 포장하는 모습(그게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석해줘서 순교라고 한다면)들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차악'이 아니라 '최선'일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공동체의 차원에서 최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냐 여부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라는 악당이 나옵니다. 정말 나쁜짓에 충실한 악당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규범에 반하는 일을 순수하게, 성실하게 저지르는 모습은 그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저는 그 나름의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서 고담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조커'를 막기 위해 영웅이 된 '배트맨'은 스스로의 역할에 큰 혼란을 느끼죠.
어쨌든 영화는 여차저차 영웅이 그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고 조커를 지키며 고담시를 지킵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통속성에 기댄 결말이죠. 하지만 저는 영화 속 다른 승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조커는 배트맨과 상대하는 것과 별도로 고담시민들을 상대로 시험을 걸죠. 일반인들이 탄 배와 죄수들이 탄 배. 그리고 각각의 배에 상대 배를 폭발시킬 수 있는 장치를 부여합니다. 예정 시간이 되면 두 배는 모두 폭발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라는 악당이 나옵니다. 정말 나쁜짓에 충실한 악당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규범에 반하는 일을 순수하게, 성실하게 저지르는 모습은 그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저는 그 나름의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서 고담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조커'를 막기 위해 영웅이 된 '배트맨'은 스스로의 역할에 큰 혼란을 느끼죠.
어쨌든 영화는 여차저차 영웅이 그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고 조커를 지키며 고담시를 지킵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통속성에 기댄 결말이죠. 하지만 저는 영화 속 다른 승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조커는 배트맨과 상대하는 것과 별도로 고담시민들을 상대로 시험을 걸죠. 일반인들이 탄 배와 죄수들이 탄 배. 그리고 각각의 배에 상대 배를 폭발시킬 수 있는 장치를 부여합니다. 예정 시간이 되면 두 배는 모두 폭발합니다.
그때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조커를 상대로 승리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두 배 모두 점화장치를 누르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 최선'을 다해 못된 짓을 저지르는 악당을 상대로 그들 자신의 '최선'의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고 사람들의 최선은 조커가 택한 최선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는 숭고함을 갖추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라면 그 생명은 어떠한 조건을 갖든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간의 본능적 감각에서 나온 아주 강력한 '최선'의 방식이었기 떄문일겁니다. 너무나 순수하고 충실한 악(?)에 맞서 '최선'이 승리를 하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입니다.
물론 이러한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동체에서 '악'으로 규정된 행위에 맞서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의 폐해는 오늘날 중동아시아 지역의 상황만 봐도 그 한계가 명확해 보입니다. 어떤 쪽에서 규정한 '절대악'이 다른 곳에서는 '절대선'으로 규정되는 상황은 빈번합니다.
물론 이러한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동체에서 '악'으로 규정된 행위에 맞서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의 폐해는 오늘날 중동아시아 지역의 상황만 봐도 그 한계가 명확해 보입니다. 어떤 쪽에서 규정한 '절대악'이 다른 곳에서는 '절대선'으로 규정되는 상황은 빈번합니다.
그래서 악과 맞서기 위해서는 '차악'이 아니라, 그 방식의 공동체의 논리적인, 그리고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합의에 의해 '최선'이 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막연한 믿음일 수 있지만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면, 악에 맞서는 최선의 대응책은 '인간적인 본능'에 걸맞을 거라고 믿습니다.
절대악과 절대선을 경계가 무의미해진 오늘날이니 이는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게는 동희씨가 말한 '살인'이 '악'이라는 전제도 동의를 할지 못하니 여전히 제 주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겠네요.
말이 조금 길었습니다 ^^
절대악과 절대선을 경계가 무의미해진 오늘날이니 이는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게는 동희씨가 말한 '살인'이 '악'이라는 전제도 동의를 할지 못하니 여전히 제 주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겠네요.
말이 조금 길었습니다 ^^
언급된 책/영화
- <체게바라 평전>, 장코르미에
- <다크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덧글
공동체, 조직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못된 버릇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공동체, 조직의 평화를 위해 개인에게 이해해라, 양보하라는 강요는 여전히 존재하지요.
그런 양보,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없어져야 합니다. 언제까지 개인에게만 손해보라고 하는 한국의 문화... 결국은 일제시대의 군사문화, 가미가제 문화의 잔재는 이제는 청산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로만 친일파 때려잡자 하지 말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 강요"," 민족, 조직, 회사에 대한 개인의 무조건 복종과 희생 강요 문화" 등을 없앴으면 좋겠네요. 더불어 야근 강요하고 회식문화... 이런건 정말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사람 하나 더 써서 적은돈을 주고라도 고용하지.
그 시간에 집에 일찍 퇴근해서 가족들을 더 보거나 or 일찌감치 자고 싶어요. 아무리 커피를 많이 마셔도 졸렵고 나른하고 마음이 답답하니... 담배를 괜히 끊었나 싶기도 합니다. 정말 회식문화, 그리고 야근강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이런것들 이제는 지긋지긋해요.
매운음식을 꼭 잘 먹어야만 하는 이유 있나요? 몸에 맞지도 않은데? 그것도 얼얼한 고통과 눈물을 참아가면서???
야근 강요... 이것도 병적입니다.
차라리 야근이나 최소인원으로 잡아돌리려 하지 말고, 적은 돈을 주더라도 젊은사람 한사람을 더 고용해서 쓰면 어디 덧나나. 가뜩이나 젊은사람들 취직도 힘든데, 그런 적은 돈으로 고용해서 경력이라도 쌓게 해주거나 or 일 좀 배우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한국의 공동체 문화는 솔직히 병적입니다. 인권이나 권리 개념이 없는, 무생물체 같아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합니다.
공동체의 이익을 핑계로 개인을 너무 쥐어 짭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너무 개인에게 요구하는게 많습니다.